하얀 장미의 이야기 1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골목길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짧은 청록색 머리의 청년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옆을 걷는 소년을 보았다. 찰랑이는 긴 연갈색 머리를 내려묶은 새하얀 소년은 쌓인 것이 많았는지 자기 팔뚝만한 맥주병을 붙잡고 물 마시듯이 벌컥벌컥 목구멍으로 열심히 맥주를 쏟아 붓고 있었다. 가끔씩 이쪽을 쏘아보는 새파란 눈동자에는 명백한 경고가 담겨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 귀찮게 따라오지 말고."
"하, 하다 못해 제안이라도 들어주세요."
"그 제안이 네 목숨보다 중요해?"
차갑게 말을 끊는 소년에게선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손으로 심장을 꼭 쥐어짜는 것 같다.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것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은 음험하고도 살벌한 느낌이 났다. 당장에라도 뒤돌아 달아나고는 싶었지만 힘이 풀린 다리는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 신세 같았다.
"조심하는게 좋아."
"무, 무엇을 조심해야한다는 거죠?"
"정체도 모르면서, 원하는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쉽게 접근하면 안 돼.“
변성기가 채 지나지 않은 미성의 목소리는 밧줄처럼 남성의 귀를 옭아매고 그의 사지를 무겁게 내리 묶었다. 침묵이 내리 앉은 골목 안에는 굶주린 맹수처럼 헐떡이는 소년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일어나지도 못한 채 주저앉은 자리에서 벌벌 떠는 남성을 바라보며 흉흉하게 눈을 빛내던 소년은 핏기 없는 자신의 창백한 피부처럼 새하얗게 미소지어주었다.
“평소대로였으면 어림없었지만 특별히 그쪽의 용기를 봐서 제안이라도 들어볼게. 자리를 옮길까?”
소년은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지팡이로 장난스럽게 남성의 무릎을 톡톡 치기 시작했다. 설마 부축까지 해줘야하는 건 아니겠지? 살살 놀리듯이 말하는 소년의 말에 남성은 벌떡 일어나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년의 웃음소리가 그의 등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겉모습은 귀엽고 예쁘장한 소년의 모습이지만 풍기는 기운만은 달랐다. 정말로 인간이 맞는 걸까? 청년은 먼저 자원한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며 밝게 빛나는 심야카페의 조명을 향해 멍하니 걷기 시작했다.
떨리는 몸을 애써 가다듬은 남성은 헛기침을 몇 번하고선 손에 들고 있는 커피잔을 몇 번씩이나 홀짝이며 자신이 온 목적을 소년에게 천천히 설명하고 이야기했다.
남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긋 웃던 소년의 얼굴에 드러난 것은 당혹감이었다. 아무리 일손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나 같은 녀석에게 시간정부가 손을 뻗다니. 시간정부라는 곳도 정말 못말리는 곳이다.
"나야 상관없긴 한데 괜찮겠어? 나 같은 것을 사니와라는 중요자리에 앉혀놔도?"
"무, 물론이죠. 당신은 훌륭한 영능력자 입니다. 당신 같은 인재는 지금 저희에게 꼭 필요한 분이십니다!"
인재(人材)가 아니라 인재(人災)겠지. 왜 소년이 꼭 사니와가 되어야하는지, 왜 시간정부로 들어와야 하는지를 주제로 일장 연설을 하는 남성을 소년은 팔짱을 낀 채 못미덥다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내 정체에 대해서 아는거라도 있어?"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만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훌륭한 영능력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디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주십시오.“
고개를 조아리는 남성을 바라보며 소년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딱 저 앞의 남성을 향해 쓰는 말인 것 같았다. 자 그럼 과연 어떻게 할까. 생각에 잠긴 소년은 남성이 한 제안을 다시금 머릿속으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수십의 츠쿠모가미를 관리하고 역사를 지킨다. 역사에 관심은 없지만 몸을 의탁할 곳이 생긴다니 손해는 아니다. 적어도 지금 사는 낡은 빌라보단 어딘지 모를 그곳이 낫겠지.
"할게. 그 사니와라는 거."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면 이곳으로..“
소년에게 책자을 건네준 남성은 몇 번씩이나 고개를 숙여가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책자에 쓰여 있는 사니와의 업무는 꽤나 복잡해보였다. 도검에 잠들어 있는 남사들을 현현시키고, 그들을 통솔하여 전장에 내보내며 역사 수정자라는 적과 맞선다. 다친 자들을 수리하고 새로운 남사를 제작한다. 게다가 서류 업무는 덤이었다.
"뭐 이리 할 일이 많지?"
"익숙해지면 잘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어디서 솟아오른지 모르는 자신감을 담아 힘내라는 듯이 소년을 응원한 청년은 재빨리 그를 데리고 혼마루로 향하기 시작했다. 게이트 안쪽으로 들어가자 눈부신 빛이 그들을 뒤덮었다. 어느새 사라진 청년을 향해 눈살을 찌푸린 소년은 주변 구경이라도 해볼 겸 지팡이를 짚고 성채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대문을 넘자 눈에 맨 처음 보인 것은 으리으리한 일본식 성이었다. 중앙에 위치한 웅장한 본채는 수십 명이 묵어도 여유로워 보였다. 거대한 병풍이 둘러쌓여 있는 방을 지나 본채의 맨 윗층으로 향하자 혼마루 전경이 한 눈에 다 보였다. 안에 있는 건물들을 보호하려는 듯이 둘러쌓인 성벽, 아직 말 한필도 없는 마구간, 아무것도 나 있지 않는 밭까지.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소년의 소유물이 되었다 규모하나는 끝내주는구나.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탄성을 자아냈다.
뉘엿뉘엿 져가는 달빛을 맞으며 혼마루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도중, 소년의 앞으로 자그만한 대롱여우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앞으로 사니와님을 모실 콘노스케라고 하옵니다!"
"네가 콘노스케로구나."
"네! 새로 부임하신 걸 축하드리옵니다!"
짧은 앞다리를 저어가며 축하하는 콘노스케의 모습은 소년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였다. 어서 따라오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콘노스케를 따라가니 그곳에는 칼 한자루가 놓여있었다. 칼을 들어 몇 번 유심히 관찰한 소년은 책자에서 본 그대로 안에 깃든 츠쿠모가미를 현현시키기 위해 검에 영력을 부었다.
영력을 부어넣자마자 화사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금발을 한 청년이 서 있었다. 굳세어 보이는 푸르른 눈과 아름다운 미형, 고집스레 앙 다문 아름다운 입술, 그리고 그 모든 걸 덮어버리겠다는 듯이 꽉 눌러쓴 더러운 거적까지. 처음 보는 츠쿠모가미의 모습에 소년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거적 아래에 감춰져있는 호수처럼 푸른 눈과 턱을 괴고 자세히 청년을 관찰하는 소년의 흥미를 담은 눈이 마주쳤다. 미간을 좁힌 금발의 청년은 틱틱거리는 말투로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야만바기리 쿠니히로다. 뭐지 그 눈은. 사본인 게 신경 쓰이나?”
“사..뭐..?”
“흥. 다 알고 있다. 사본인 내가 불만인거지?”
첫 만남부터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소년은 침착하게 들고 있는 책자를 이리저리 넘기며 남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려고 하였지만 책자에는 사니와가 해야 하는 일만 잔뜩 적혀있었다. 앞으로 이들을 이끌어야하는데 첫 만남부터 말썽이면 매우 곤란해진다.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자기는 사본이라며 중얼거리는 야만바기리를 달랠 말을 소년은 필사적으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이 거리를 좁힐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말을 떠올리고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하던 찰나, 산 너머로 태양이 빼꼼 고개를 내밀며 밤에 잠겨있던 혼마루를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달린 것처럼 몸이 축축 늘어지고 느껴지지 않았던 피로가 몰려온다.
“야만바기리..라고 했지? 난 잠시 눈좀 붙이러 갈게. 자기소개는 나중에.”
“자, 잠깐..”
본채로 들어가 햇볕이 안드는 곳을 찾는 소년의 두 눈은 이미 반쯤 감겨있었다. 새어나오는 빛 한 점 없는 방 한가운데로 들어가 손을 가슴가에 모으고 가만히 누운 소년의 몸은 조금의 미동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본이여서 날 내버려두고 잠이든 건가. 혹여나 그를 깨울까봐 조용히 문 앞에 앉은 야만바기리의 자기비하는 끊일 줄 몰랐다.